2020-01-23 10:23  |  오피니언

[추니박과 함께 걷는 그림여행⑤]나에게 영감을 준 경북 청송의 이름없는 절벽들...

작품 ‘낯선, 어떤풍경’ 시리즈의 배경이 된 청송의 숨은 절벽과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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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 절벽사생, 화첩에 먹, 2005 / 그림=추니박
[아시아아츠 = 김창만 기자]
솔직하게 말해서,,, 오래전 사람들에게 청송은 사과와 교도소가 있는 곳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청송에 사는 내 친구나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이 그렇다는 얘기다.

얼마나 험하고 깊은 골 안에 있는 동네인지를 설명할 때 지금까지 한 명도 탈주한 적이 없고 또 탈출할 마음을 먹지 못할 만큼 사방이 막힌 곳이라 교도소를 세웠다는 예를 들 정도다. 그만큼 청송이 오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예술가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청송은 내게 무척 중요한 장소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내 그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절벽 그림을 새롭게 번안해 낸 아주 독특한 인연을 가진 곳이 청송과 영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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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 여름, 화첩에 모필사생, 2005 / 그림=추니박

2005년 2월 처음 청송을 가게 된 것은 절벽이 독특하다는 주왕산과 물 위에 떠있는 나무가 정말 신기하다는 주산지를 스케치 하려고 간 것 이였다. 하지만 정작 나를 정말 매료 시킨 건 주왕산과 주산지가 아니라 이곳저곳 길가에 병풍처럼 서있는 이름 없는 절벽들이었다. 큰 덩어리로 이루어진 다른 지역의 절벽과 달리 작은 바위가 아기자기한 구조로 이루어진 웅장한 절벽은 그리면 그릴수록 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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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여름절벽사생, 화첩에 모필, 2005 / 그림=추니박


청송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만나는 곳이 영양이다. 우리가 청양고추라고 부르는 고추의 원산지가 바로 청송과 영양의 앞뒤 글자를 따서 지은 말이다. 그만큼 그 둘을 비슷한 지형과 환경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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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여름, 화첩에 모필사생, 2005 / 그림=추니박

나는 영양과 청송을 오가며 웅장하고 멋들어진 절벽을 사생하고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진보면 군립청송야송미술관 관장이신 야송 이원좌 선생님과 약주도 한잔 하고 그림 얘기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 야송 선생님은 홍대를 졸업하시고 야인으로 지내시며 전국의 산수를 그리러 다니셨는데 특히 청량산을 주제로 그린 높이 6.7미터 길이 48미터의 ‘청량대운도’라는 엄청난 크기의 대작을 그리신 분이다.

진보면이 고향이신 선생님을 위해 청송군에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야송미술관을 짓고 관장으로 모셔서 한 곳에 머무르며 청송의 자연을 주제로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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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던 여름날의 기록, 화첩에 모필사생, 2005 / 그림=추니박


그렇게 와이프와 청송으로 스케치를 다녀온 후 2005년 여름 학생들과 청송으로 스케치를 다녀왔다. 한 20여 명의 학생들과 화가들이 함께한 스케치 여행이였는데 그 당시 날씨가 36도를 웃돌만큼 더웠다.

붓을 들고 스케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문일 정도로 날씨가 뜨거워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그냥 극기 훈련 수준의 수행 이였다고 할 수 있다. 가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힘들고 지겹고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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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필사생-청송, 화첩에 먹, 2005 / 그림=추니박

그날 저녁 실경산수화의 대가로 인정받던 야송 선생님에게 학생들을 위해 간단한 강의를 부탁드렸는데 선생님께서 한 말씀 중에 중요한 것이 있었다. 우리가 뜨거운 것을 먹어도 마음에 들면 ‘시원하다’라고 하지 않느냐,,,,그러니 그림도 그냥 시원하게 그려라,,,,그러면 다들 좋아하고 감동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이셨다.

‘시원하다’는 표현은 한국인의 가장 독특한 표현법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우리는 물을 마셔도 뜨거운 음식을 먹어도 어떤 좋은 풍경을 봐도 ‘시원하다’라는 표현을 참 많이 쓴다. 그만큼 ‘시원하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한다.

그 말이 내게 무척이나 힘이 되었는지 다음날 나는 정말 이전과 다르게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스케치를 했다. 자연을 자세히 묘사하려던 전날의 기억을 지우고 마음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쓱쓱 그림을 그렸다. 신나는 일이었다. 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편하게 그리는 일은 그 자체가 희열이고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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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필사생-청송의 여름, 화첩에 모필, 2005 / 그림=추니박

그렇게 그림을 즐기고 있는데 옆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학생들 중에 하나가 선생님 목말라요! 이럴 때 수박이나 먹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리던 스케치 위에 수박을 그려 넣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을 기록하는 마음으로 수박도 그리고 먹고 싶은 바나나도 그리고,,, 그야말로 그림을 그리며 신나게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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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이 있는 풍경, 190X136, 한지에 혼합재료, 2005 / 그림=추니박


어쨌든 청송에서 무더위에 지쳐 헤매다가 문득 떠오른 영감 때문에 자유스럽게 휙휙 그린 스케치가 계기가 돼서 여름 청송 스케치를 다녀온 후 이전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절벽 그림 시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나는 절벽을 그리면서 절벽에 낙서도 하고 그리운 이들의 얼굴도 그리고 그 시대 중요한 화두가 되는 사건들을 기록하기도 하고 그때 그 현장에서 먹고 싶었던 수박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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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있는 풍경, 한지에 혼합재료, 2005 / 그림=추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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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바나나가 있는 풍경, 190136, 한지에 먹, 2005 / 그림=추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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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소파가 있는 풍경, 한지에 혼합재료, 2005 / 그림=추니박

절벽을 그리는 선을 음악의 선율을 따르듯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긋고 절벽 앞에는 태권브이가 서있거나 어린 아들이 서있기도 하고 뜬금없이 길거리에서 본 우체통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과 내 삶이 어우러져 그려진 그림에 나는 ‘낯선, 어떤풍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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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어떤풍경-소식 , 한지에 혼합재료, 2005 / 그림=추니박


2005년 가을 청송의 절벽 스케치를 배경으로 준비한 작품으로 인사동 갤러리쌈지에서 ‘낯선, 어떤풍경’전을 열었다. 그 전시는 당시 화단에 꽤나 흥미로운 전시로 평가되었고 다음 해 열린 금호미술관의 ‘흐르는 풍경’의 성과에 힘입어 2006년 동아일보 주최 평론가가 뽑은 각 분야 1위중 한국화 부문 1위로 뽑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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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어떤풍경-여름이야기, 190X136, 한지에 혼합재료, 2005 / 그림=추니박

그 무더위의 고통과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림을 ‘시원하게 그려라’라는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 때의 스케치 여행은 내게 엄청난 변화를 안겨주었다.

몇 년 전 화가 오원배, 황주리, 최석운, 이인 선생과 소설가 김주영 선생을 모시고 김주영 선생의 신작 ‘엄마를 읽다’와 객주문학관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를 위해 청송 스케치여행을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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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어떤풍경-날다, 한지에 혼합재료, 2005 / 그림=추니박

그 여행은 청송군 관계자들의 세세한 안내로 청송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제 청송은 한국의 중요한 소설가 김주영선생의 객주문학관도 있고 정통 산수화가 이원좌선생의 야송미술관도 있는 문화예술의 고장이 되었다.

며칠 전 청송에 사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작년에 야송미술관 이원좌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다는 것이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뿐이다.

늦었지만 이 글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선생님께서 남기신 대작들이 꼭 중요한 미술사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말을 새삼 감사하게 생각하는 시간이다.


[추니박과 함께 걷는 그림여행] 글·그림 추니박

사비나미술관 4층 추니박 개인전 작품 설치 / 출처=‘추니아트’ 유튜브 채널

추니박(박병춘)은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을 비롯해 32회의 개인전과 200여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0년부터 산수풍경시리즈를 시작하고 그동안 독특한 작품을 발표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그는 2010년 중앙일보 주최 평론가가 뽑은 3040작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많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추니아트’로 미술 애호과들과 소통 중이다.

김창만 기자 chang@asiaart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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